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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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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테네 역병은 기원전 430년부터 426년까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에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공격을 피해 인구 과밀 상태였고, 역병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되어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역병의 증상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발열, 인후통, 궤양, 설사 등을 주요 증상으로 묘사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출혈열 등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역병으로 인해 사회적 도덕성이 붕괴되고, 종교적 혼란이 발생했으며, 인구 구조가 변화했다. 아테네 인구의 약 25%가 사망했고, 아테네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쇠퇴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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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역병
개요
"고대 도시의 역병", 미힐 스베르츠, 1652–1654년경
위치그리스
발생 시기기원전 430–426년
사망자 수75,000–100,000명
명칭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Loimos tôn Athênôn
원인
추정 질병장티푸스

2. 시대적 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 발발 당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코린토스를 제외하면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육상 세력이었다. 반면 아테네는 우수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46][4]

기원전 431년,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이 육상 공격을 시작하자,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휘 아래 아테네 성벽 안으로 후퇴하여 방어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아테네의 해상 우위를 활용해 보급로를 확보하고, 스파르타군의 이동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46][4]

그러나 이 전략은 아티카 농촌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이미 인구가 많은 아테네 도시 안으로 대거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전 약 10만에서 15만 명(시민 6만, 메토이코이 2만 5천, 노예 7만 이하)이었던 인구는 30만에서 40만 명으로 3~4배 급증했다.[3] 이로 인해 도시는 극심한 인구 과밀과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46][4] 아테네인들은 소를 에우보이아로 옮기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3]

급격한 인구 증가는 비좁은 거주 환경과 열악한 위생 상태를 야기했고, 아테네는 질병이 발생하고 확산되기 쉬운 온상이 되었다.[46][4]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장벽 내부의 과밀 상태와 불결한 위생 환경이 역병 확산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8]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 역병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그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았다.[46][5] 그는 역병이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되어 이집트리비아를 거쳐 그리스 세계로 퍼졌고, 이후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기록했다.[46][5] 역병은 아테네의 주요 항구인 피레우스에서 처음 발생하여, 피난민들이 임시 거주하던 아테네 장벽 안쪽으로 퍼져나갔다.[7][8]

이 역병은 매우 치명적이어서 이전에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던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고 환자와 가장 많이 접촉했기에 먼저 희생되었다.[5] 인구 과밀 상태였던 아테네에서 역병은 시민의 약 25%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46][5] 일부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이 승리를 위해 식수원을 오염시켜 역병을 일으켰다고 의심하기도 했다.[4] 한편, 스파르타 군대는 아테네의 장례 화장터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질병 감염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46][5]

3. 역병의 증상

투키디데스는 역병 피해자들이 겪었던 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고, 증상을 기록하여, 다시 발병할 경우 이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5][26] 그에 따르면, 아테네 역병은 머리에서 증상이 시작되어 신체의 나머지 부분으로 퍼져나갔다.[43][2]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주요 증상은 다음과 같다.[2][43]


  • 발열
  • 눈의 충혈 및 염증
  • 출혈과 구취를 동반하는 인후염
  • 재채기
  • 목소리 상실
  • 기침
  • 구토
  • 몸에 농포와 궤양 발생
  • 극심한 갈증
  • 불면증
  • 설사
  • 경련
  • 괴저


투키디데스는 환자의 몸이 겉으로 만졌을 때는 심하게 뜨겁지 않았고 창백하지도 않았으며, 붉은 빛을 띠고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기는 등 활기찬 색을 보였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몸 안의 열은 매우 격렬해서 환자들은 아주 얇은 옷조차 견디지 못했고, 옷을 벗고 차가운 물에 뛰어들고 싶어 했다. 극심한 갈증으로 어떤 환자들은 물을 끊임없이 마셨지만 해소되지 않았다. 또한 환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병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기력이 이상할 정도로 유지되었다. 병이 진행되면서 격렬한 배뇨와 설사가 뒤따랐고, 이는 환자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27] 역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9]

4. 역병의 원인 추정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아테네 역병의 원인이 되는 질병을 규명하려 노력해 왔으나[28]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역병의 원인 규명은 주로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남긴 상세한 기록과 현대 의학 및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존하고 있다.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으며, 주요 후보로는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천연두, 홍역, 독성 쇼크 증후군, 그리고 에볼라와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 등이 거론된다.[28][29]
발진티푸스 가설1999년 1월, 메릴랜드 대학교는 연례 의학 컨퍼런스에서 아테네 역병의 원인을 발진티푸스로 결론지었다.[31] 듀크 대학교 의학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듀락 박사는 "유행성 발진티푸스가 가장 적절한 설명"이라며, 전쟁과 궁핍 시기에 유행하고 약 20%의 치사율을 보이며, 발병 약 7일 후에 사망에 이르게 하고 때로는 손가락과 발가락 끝의 괴저와 같은 합병증을 유발하는 특징이 투키디데스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32] 메릴랜드 대학교 의과대학의 필립 맥코위악 교수는 원인균으로 리케차 프로와제키이(''Rickettsia prowazekii'') 박테리아를 지목했다.[31] 이 가설은 투키디데스 연구의 권위자인 A. W. 곰[33]과 그리스 학자 앙겔로스 블라호스(Άγγελος Βλάχοςel)[34] 등 여러 학자의 지지를 받았다. 블라호스는 그의 저서 ''투키디데스에 대한 소견''(Παρατηρήσεις στο Θουκυδίδηel)에서 "오늘날 곰에 따르면, 그것이 발진티푸스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Σήμερα, όπως γράφει ο Gomme, έχει γίνει από όλους παραδεκτό ότι ήταν τύφοςel)라고 언급하며 곰의 의견을 지지했다.
장티푸스 가설장티푸스 역시 유력한 원인으로 제시된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증상 중 서서히 오르는 39°C~40°C의 고열, 오한, 서맥(느린 심박수), 쇠약, 설사, 두통, 근육통, 식욕 부진, 복통, 발진(장미진) 등은 장티푸스의 특징과 상당히 유사하다.[5] 그러나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것처럼 청소 동물(개, 새 등)이 감염되어 죽는 현상은 장티푸스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35] 장티푸스의 발열은 비교적 느리게 시작되고 사망은 주로 질병 후반부에 발생하는 등 일부 차이점도 존재한다.

2005년, 아테네 대학교의 마놀리스 파파그리고라키스 박사 연구팀은 케라메이코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집단 매장지 유골의 치아 치수에서 DNA 분석을 수행했다. 그 결과, 장티푸스를 유발하는 살모넬라 엔테리카(''Salmonella enterica'')의 DNA 염기서열과 유사한 서열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여 장티푸스 가설에 힘을 실었다.[36]

하지만 이 연구 결과에 대해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의 베스 샤피로 박사를 포함한 다른 연구팀은 PCR 분석 과정에서의 오염 가능성 등 심각한 방법론적 결함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37] 이들은 해당 DNA 서열이 살모넬라균임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장티푸스를 일으키는 특정 혈청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38] 이에 대해 파파그리고라키스 연구팀은 제기된 반박의 근거가 미약하며, 사용된 방법론은 타당하다고 재반박했다.[39][40]
바이러스성 출혈열 (VHF) 가설에볼라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성 출혈열 (VHF) 또한 원인으로 고려된다. 투키디데스가 언급한 간병인들 사이의 높은 감염 위험은 사람 간 접촉으로 쉽게 전파되는 VHF의 특징과 부합한다.[41] 또한, 아테네를 포위하고 있던 스파르타 군대는 역병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 투키디데스가 역병의 기원을 아프리카(에티오피아)로 지목한 점[29] 등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증상 중 일부, 예를 들어 '' (λύγξ κενήgrc)를 딸꾹질로 해석할 경우,[41] 이는 에볼라 감염 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다. 또한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생존자들의 생식기 및 눈의 후유증 역시 현대 에볼라 생존자들에게서 관찰되는 증상과 유사하다는 점도 지적된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그의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아테네 역병을 묘사하며 신체 여러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기술했는데("sudabant etiam fauces intrinsecus atrae / sanguine" – 목구멍은 안에서 피로 검게 땀을 흘렸다), 이는 출혈열의 특징과 일치한다.

그러나 VHF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대부분 RNA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쉽게 분해되어 고고학적 유물에서 DNA와 같은 명확한 유전적 증거를 찾기 매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가설은 현재 과학 기술로는 직접적인 검증이 어렵다.
기타 가능성 및 결론위에 언급된 질병들 외에도 천연두, 홍역, 독성 쇼크 증후군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었다.[28] 또한, 당시 아테네의 극심한 인구 과밀과 열악한 위생 상태를 고려할 때, 여러 종류의 전염병이 동시에 유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투키디데스는 역병 생존자들이 동일한 질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 면역력을 얻었다고 기록했는데,[5] 이는 단일 질병원인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복합 감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30] 혹은 아테네 역병이 현재는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질병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아테네 역병의 정확한 원인은 다양한 가설과 반론이 공존하는 가운데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5. 사회적 영향

아테네 역병 당시 사망한 11세 소녀 미르티스의 재구성된 모습으로, 유해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케라메이코스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프랑수아 시플라르의 작품으로, 페리클레스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모습 (아테네 역병으로 인한 사망)


아테네 역병에 대한 기록은 전염병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역병 기간 동안 아테네 사회의 도덕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묘사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 참사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게 되자 종교나 법의 모든 규칙에 무관심해졌다."[13]고 기록하며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했다. 이러한 역병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행동 변화는 중세 시대 흑사병 유행 시기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14]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기보다는 전염병 유행 시 나타나는 도덕적 공황이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15][16]

투키디데스는 질병의 높은 전염성 때문에 기존의 사회 규범이 무너지는 모습도 상세히 기록했다.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에, 간병을 자처하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많은 환자들이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신들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쌓이거나 집단 매장지에 버려졌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장례 화장터에 자신의 시신을 던져놓고 가는 일도 벌어졌다. 역병에서 살아남아 면역력을 갖게 된 사람들은 이후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주요 역할을 맡게 되었다.[9]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병을 앓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통받는 다른 이들에게 가장 큰 동정심을 느꼈으며,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환자들을 도왔다.

이러한 투키디데스의 묘사는 고고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된다. 기원전 430년에서 42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 매장지와 약 1,000개의 무덤이 아테네의 고대 케라메이코스 묘지 외곽에서 발견되었다.[6] 1994~95년에 발굴된 집단 매장지에는 약 240명의 유골이 무질서하게 묻혀 있었으며,[18] 이는 역병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대규모 사망과 혼란 속에서 급하게 매장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18] 발굴자인 에피 바지오토풀루-발라바니는 매장 방식과 부장품의 상태를 볼 때, "공황 상태에서 발생한 대량 매장"이며 이는 역병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18]

5. 1. 법과 질서의 붕괴

아테네 역병은 당시 사회 질서와 도덕성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역사가 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역병이 만연했을 때 사회적 도덕성이 크게 무너졌다고 기록했다.[13] 그는 "그 참사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게 되자 종교나 법의 모든 규칙에 무관심해졌다."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13] 이러한 아테네 역병 당시의 집단적 사회 및 종교적 행동의 변화는 중세 흑사병 유행 시기와 유사하다는 평가가 있으며,[14]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이 실제 상황이라기보다는 질병 유행 시 나타나는 도덕적 공황이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15][16]

투키디데스는 사람들이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돈을 함부로 쓰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현명하게 투자해도 그 결실을 누릴 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가난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갑작스럽게 친척의 재산을 상속받아 예상치 못하게 부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좋은 평판을 쌓아도 이를 누릴 만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명예롭게 행동하려는 의지를 잃었다고 기록했다.[17]

역병은 또한 종교적인 믿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질병이 신에 대한 경건함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닥치자 사람들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9] 심지어 신성한 장소인 사원들조차 아테네 시골에서 온 피난민들이 임시로 머무는 장소가 되었고, 곧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비참한 공간으로 변했다고 그는 묘사했다.[20]

5. 2. 종교적 혼란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3]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중세 시대의 흑사병 유행 당시 기록과 유사점을 보이며,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들이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전염병 유행 시 나타나는 근거 없는 도덕적 공황이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일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4][15][16]

역병은 종교적인 불안감과 의심을 증폭시켰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질병이 신앙심의 깊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자, 사람들은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신을 섬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9]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던 사원들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곧 죽어가는 사람들로 넘쳐나면서 비참한 장소로 변해버렸다. 아테네 시골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사원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20]

많은 아테네인들은 역병을 신들이 스파르타를 돕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그들은 아폴론(질병과 의학의 신)이 스파르타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신탁과 "도리아인(스파르타인) 전쟁이 오면 역병도 함께 올 것이다"라는 과거의 예언을 근거로 들었다.[21]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이러한 해석에 회의적이었으며, 사람들이 단순히 미신에 빠졌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이론에 기반하여,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역병의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체를 먹는 새나 동물들이 사라진 것을 관찰했지만, 그 이유가 시체를 먹고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체를 피했기 때문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사람의 시체를 먹는 모든 새와 짐승은 (시체가 매장되지 않고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지는 것을 삼가거나, 맛본 후 죽었다. 이것의 증거로, 이런 종류의 새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시체 주변에 있지 않았고, 실제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22]

5. 3. 인구 구조 변화

아테네 역병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록된 가장 큰 인명 피해 중 하나를 야기했고, 아테네 사회를 붕괴시킨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이 전염병으로 당시 25만에서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아테네 인구의 약 25%가 사망했다.[23]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인구가 회복하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이 전염병은 또한 아테네의 전반적인 국력 상실에 기여했다.[3]

투키디데스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죽고 그들의 재산이 하층 계급의 남아있는 친척들에게 상속되면서 시민들 간의 권력 균형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부유한 시민이었던 투키디데스는 하층 계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3]

메토이코이(거류 외국인)와 시민의 비율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50년에 메토이코이는 아테네 인구의 5분의 1에서 2분의 1 사이였을 것이다). 이 전염병은 메토이코이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페르시아 전쟁의 난민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원전 490년대와 480년대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3]

전염병 이전인 기원전 451/450년에 통과된 페리클레스의 시민권법은 아테네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만 아테네 시민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24] 이 법은 전염병으로 시민 수가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지 1년 후인 기원전 402년에 재확인되었다.[3] 시민 인구의 감소는 잠재적인 병력의 수와 아테네가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의 양을 모두 감소시켰다. 남아있는 많은 아테네인들은 서류를 위조하거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원래 신분을 숨긴 메토이코이로 밝혀졌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발각된 후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2년 만에 아테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아테네는 이 피해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아테네의 정치적 힘은 약화되었고, 군대와 시민들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아테네는 이후 스파르타에게 패배했고 고대 그리스의 주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플루타르코스가 4세기 이상 후에 쓴 글에 따르면, 아테네의 지도적인 정치가인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29년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와 동시대 인물이자 그의 지지자였던 투키디데스는 이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3][25]

6. 역병의 종식과 영향

아테네 역병은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아테네 사회를 붕괴시킨 예상치 못한 재앙이었다. 당시 약 25만에서 30만 명으로 추산되던 아테네 인구의 약 25%가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23]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인구가 역병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기록했다.[3]

역병은 아테네 사회 구조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이 많이 사망하면서 그들의 재산이 하층 계급의 남은 친척들에게 상속되었고, 이는 시민들 사이의 권력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3] 또한, 메토이코이(외국인 거주자)와 시민의 비율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역병은 메토이코이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3] 역병 이전인 기원전 451/450년에 제정되었던 페리클레스의 시민권법은 아테네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시민으로 인정했는데, 이 법은 전쟁이 끝난 후인 기원전 402년에 다시 시행되었다.[3][24] 시민 인구의 감소는 아테네가 동원할 수 있는 잠재적 병력의 수를 줄였고, 정치적 영향력 또한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역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2년 만에 아테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아테네는 이전의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군대와 시민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네는 기원전 4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규모 군사 작전인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역병은 결국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하고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아테네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 역시 기원전 429년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플루타르코스가 후대에 남긴 기록에 따른 것이며, 페리클레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투키디데스는 그의 저서에서 페리클레스의 사망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3][25]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아테네에 심각한 지도력 공백을 가져왔다.

참조

[1] 논문 The plague of Athens: epidemiology and paleopathology 2009-10
[2]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3] 논문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Plague of Athens http://digilib.phil.[...] 2017
[4] 웹인용 The Plague of Athens killed tens of thousands, but its cause remains a mystery https://www.national[...] 202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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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서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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